Interview over an e-mail
Korean 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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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민간인 학살이 일어난 뒤 유가족들은 어떤 방법으로 의견을 표출해 왔었나요?(예. 정부에 항의 등등)
- 한국전쟁시기 민간인학살은 주로 전쟁 전과 전쟁 기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전쟁 전은 크게 대구 일원에서 일어난 1946년 10월 항쟁으로 인한 민간인학살과 1948년 4월 3일 이후 제주서 일어난 민간인학살, 그리고 1948년 10월 19일 이후 여수 순천 등지에서 일어난 민간인학살, 그 외 지리산 일대 등 여러 남한 지역에서 공산당을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죄없는 수많은 민간인학살 등으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1950년 6월 25일 일어난 한국전쟁기에는 초기 즉 (1950년 6월 ~ 8월) 전국 형무소에 갇혀 있던 재소자들과 국민보도연맹원을 법적 근거도 없이 의도적이고 계획적으로 집단 학살하였고, 그 숫자가 20만명~30만명으로 추산됨.
다음으로 서울 수복(1950년 9월28일)후 북한 인민군이 점령했던 약 3개월 동안 인민군에 동조나 부역을 했다는 혐의를 씌워 이것도 아무런 법적 근거도 없이 수많은 민간인들을 집단적으로 학살하였음.
그 외에도 전쟁 기간 중 지리산 공비 토벌(예, 거창 사건 등)을 하면서 그 일대에 살고 있었던 수많은 민간인학살과 전국 방방곡곡에서 벌어진 미군(특히 공군)에 의한 폭격으로 인한 민간인 학살 등이 있습니다.
1953년 7월 전쟁이 끝난 뒤, 유족들은 입도 벙긋할 수 없었고, 귀가 있어도 들을 수 없는 살벌한 시대를 살아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나서면 빨갱이로 몰려 감옥에 가는 것은 물론 무지막지한 탄압을 당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거기다 유족들에게는 연좌제라는 주홍글씨를 새겨 정상적인 사회 생활(예, 공무원, 해외)을 아예 못하게 법으로 규제를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나라가 민주화가 된 1990년대 이후부터 일부 유족들이 목숨을 내놓고 나서서 활동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정부와 국회에 탄원서도 보내고 항의 집회도 하기 시작하였고, 심지어는 유엔에 가서 민간인학살의 진상규명을 해달라고 외치기도 하였습니다.(시민사회단체 및 관련 전문가들의 노력도 많았음)
그런 노력의 결과, 2005년 5월 노무현 정부때 와서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에 대한 진상규명을 조사하는 한시적인 기구(진실화해위원회)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100만 명 중 겨우 15,000명 정도가 진실규명을 받았습니다. 이후 그 기구는 2010년 12월31일 활동을 종료하였습니다.
(신고기간은 단 1년이었음/2005년12월1일~2006년11월30일)
이후 당시 신고하지 못한 수많은 미신고(미신청) 유족들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해달라고 정부와 국회에 요구하지만 지금까지 묵묵부답임.
2. 그 활동들에 대해 정부나 미국에서의 어떤 답을 하였나요? 보상이나 조치를 한 적은 없나요?
위에서 언급했기 때문에 보충 설명을 하자면...
미국은 수많은 미군폭격으로 학살된 민간인사건 중 하나인 노근리 미군학살 사건에 대해 1999년 AP통신 보도에 의해 어쩔수없이 2000년 진상위원회를 구성하여 조사하여 읿부 진실을 밝혔고, 배보상은 없었고, 2004년 정부는 특별법을 제정하여 노근리 평화공원을 조성하였음.
거창(산청,함양)사건은 1996년 국회에서 특별법을 제정하여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하였고, 이에 따라 거창과 산청(함양)에 추모공원을 조성하였으나, 마찬가지로 배보상은 없었음.
제주4.3희생사건도 2000년 특별법 제정을 통해 진상규명과 일부 명예회복을 하였고, 그에 따라 평화공원을 조성하였음. 배보상은 없었음.
3. 그 당시 사건의 생존자분들은 몇 분정도 남아계신가요?
당시 학살 현장에서 기적적으로 살아 오신 희생자들은 세월이 너무 흘러 지금 생존자는 없는 것으로 파악됨.
다만, 당시 학살당한 유족(주로 자식)들은 지금 정확히는 파악되지 않으나 수백 만명이 있을 것으로 추정함.
왜냐하면 정부는 당시 학살된 민간인에 대한 숫자를 파악했는지 아니했는지는 모르지만
정확히 밝히지 않고 있음.
4. 생존자분들의 대체적인 주장은 무엇인가요?
1) 당시 희생자의 숫자
2) 희생자에 대한 철저한 조사를 통한 올바른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3) 집단학살당한 채 매장된 유해 발굴과 추모공원 조성, 추념일 제정 등
4) 가해자에 대한 처벌과 국가의 사과
5) 재발 방지를 위한 조치(예, 교과서 수록, 군인과 경찰 등 당시 가해자들뿐 만 아니라 일반 국민들에게 인권 교육 실시 등)
5. 그 사건들을 겪고 난 뒤, 유가족분들은 어떤 심적이나 육체적 고통이나 상해를 입으셨는지..
아버지없는 고통스런 삶, 가족들조차 쉬쉬하면서 아버지의 죽음(존재감)에 대해 입을 열수 없는 시대상황을 겪으면서 엄청난 트라우마를 지닌 삶을 살아 왔다고 봅니다.
거기다 세상을 원망하면서 살아 옴. 대부분 연좌제에 묵인데다가 아버지없는 가족이라 가난과 멸시 그리고 감시속에 일생을 살아왔다고 보아도 됩니다.
혹시 어떤 활동들을 하신 사진들이 있으시다면 보내주실 수 있으신가요?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하자 한반도는 전승국인 미국․소련에 의해 일본군을 무장해제시킨다는 명목으로 분할 통치되었다. 38선을 그어 이북은 소련이 점령하고, 이남은 미국이 점령하였다.
그 해 9월 점령군으로 인천을 통해 들어온 미국은 당시 환영 나온 우리 국민들을 향해 총을 쏘아 죽이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하였다.
- 한국전쟁시기 민간인학살은 주로 전쟁 전과 전쟁 기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전쟁 전은 크게 대구 일원에서 일어난 1946년 10월 항쟁으로 인한 민간인학살과 1948년 4월 3일 이후 제주서 일어난 민간인학살, 그리고 1948년 10월 19일 이후 여수 순천 등지에서 일어난 민간인학살, 그 외 지리산 일대 등 여러 남한 지역에서 공산당을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죄없는 수많은 민간인학살 등으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1950년 6월 25일 일어난 한국전쟁기에는 초기 즉 (1950년 6월 ~ 8월) 전국 형무소에 갇혀 있던 재소자들과 국민보도연맹원을 법적 근거도 없이 의도적이고 계획적으로 집단 학살하였고, 그 숫자가 20만명~30만명으로 추산됨.
다음으로 서울 수복(1950년 9월28일)후 북한 인민군이 점령했던 약 3개월 동안 인민군에 동조나 부역을 했다는 혐의를 씌워 이것도 아무런 법적 근거도 없이 수많은 민간인들을 집단적으로 학살하였음.
그 외에도 전쟁 기간 중 지리산 공비 토벌(예, 거창 사건 등)을 하면서 그 일대에 살고 있었던 수많은 민간인학살과 전국 방방곡곡에서 벌어진 미군(특히 공군)에 의한 폭격으로 인한 민간인 학살 등이 있습니다.
1953년 7월 전쟁이 끝난 뒤, 유족들은 입도 벙긋할 수 없었고, 귀가 있어도 들을 수 없는 살벌한 시대를 살아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나서면 빨갱이로 몰려 감옥에 가는 것은 물론 무지막지한 탄압을 당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거기다 유족들에게는 연좌제라는 주홍글씨를 새겨 정상적인 사회 생활(예, 공무원, 해외)을 아예 못하게 법으로 규제를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나라가 민주화가 된 1990년대 이후부터 일부 유족들이 목숨을 내놓고 나서서 활동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정부와 국회에 탄원서도 보내고 항의 집회도 하기 시작하였고, 심지어는 유엔에 가서 민간인학살의 진상규명을 해달라고 외치기도 하였습니다.(시민사회단체 및 관련 전문가들의 노력도 많았음)
그런 노력의 결과, 2005년 5월 노무현 정부때 와서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에 대한 진상규명을 조사하는 한시적인 기구(진실화해위원회)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100만 명 중 겨우 15,000명 정도가 진실규명을 받았습니다. 이후 그 기구는 2010년 12월31일 활동을 종료하였습니다.
(신고기간은 단 1년이었음/2005년12월1일~2006년11월30일)
이후 당시 신고하지 못한 수많은 미신고(미신청) 유족들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해달라고 정부와 국회에 요구하지만 지금까지 묵묵부답임.
2. 그 활동들에 대해 정부나 미국에서의 어떤 답을 하였나요? 보상이나 조치를 한 적은 없나요?
위에서 언급했기 때문에 보충 설명을 하자면...
미국은 수많은 미군폭격으로 학살된 민간인사건 중 하나인 노근리 미군학살 사건에 대해 1999년 AP통신 보도에 의해 어쩔수없이 2000년 진상위원회를 구성하여 조사하여 읿부 진실을 밝혔고, 배보상은 없었고, 2004년 정부는 특별법을 제정하여 노근리 평화공원을 조성하였음.
거창(산청,함양)사건은 1996년 국회에서 특별법을 제정하여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하였고, 이에 따라 거창과 산청(함양)에 추모공원을 조성하였으나, 마찬가지로 배보상은 없었음.
제주4.3희생사건도 2000년 특별법 제정을 통해 진상규명과 일부 명예회복을 하였고, 그에 따라 평화공원을 조성하였음. 배보상은 없었음.
3. 그 당시 사건의 생존자분들은 몇 분정도 남아계신가요?
당시 학살 현장에서 기적적으로 살아 오신 희생자들은 세월이 너무 흘러 지금 생존자는 없는 것으로 파악됨.
다만, 당시 학살당한 유족(주로 자식)들은 지금 정확히는 파악되지 않으나 수백 만명이 있을 것으로 추정함.
왜냐하면 정부는 당시 학살된 민간인에 대한 숫자를 파악했는지 아니했는지는 모르지만
정확히 밝히지 않고 있음.
4. 생존자분들의 대체적인 주장은 무엇인가요?
1) 당시 희생자의 숫자
2) 희생자에 대한 철저한 조사를 통한 올바른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3) 집단학살당한 채 매장된 유해 발굴과 추모공원 조성, 추념일 제정 등
4) 가해자에 대한 처벌과 국가의 사과
5) 재발 방지를 위한 조치(예, 교과서 수록, 군인과 경찰 등 당시 가해자들뿐 만 아니라 일반 국민들에게 인권 교육 실시 등)
5. 그 사건들을 겪고 난 뒤, 유가족분들은 어떤 심적이나 육체적 고통이나 상해를 입으셨는지..
아버지없는 고통스런 삶, 가족들조차 쉬쉬하면서 아버지의 죽음(존재감)에 대해 입을 열수 없는 시대상황을 겪으면서 엄청난 트라우마를 지닌 삶을 살아 왔다고 봅니다.
거기다 세상을 원망하면서 살아 옴. 대부분 연좌제에 묵인데다가 아버지없는 가족이라 가난과 멸시 그리고 감시속에 일생을 살아왔다고 보아도 됩니다.
혹시 어떤 활동들을 하신 사진들이 있으시다면 보내주실 수 있으신가요?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하자 한반도는 전승국인 미국․소련에 의해 일본군을 무장해제시킨다는 명목으로 분할 통치되었다. 38선을 그어 이북은 소련이 점령하고, 이남은 미국이 점령하였다.
그 해 9월 점령군으로 인천을 통해 들어온 미국은 당시 환영 나온 우리 국민들을 향해 총을 쏘아 죽이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하였다.